차표를 구하지 못해 결국 춘절 휴가 계획이 다 망가지는 바람에 시내에서 설날을 맞기로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니 C가 추천해 준 화시(花市), 즉 새해 맞이 꽃시장이 떠오른다.
"춘절에 어디 안가고 광저우에 있을 거면 음... 화시에나 가 봐. 그나마 좀 볼만할 거야."
설날 연휴를 거의 한번도 광저우에서 보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광저우의 새해맞이 꽃시장은 규모도 크거니와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뉴스에서 얼핏 올해는 꽃시장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열리기로 정해졌다며 개장일을 알려준 기억도 난다. 비가 와서 쌀쌀하고 추적추적한 날씨에 갈까말까 하루 종일 고민하며 뒹굴거리다 세시쯤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하품을 하다 내 카메라를 보고 급히 입을 다물고 빙긋 웃던 꽃시장의 꽃남자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은 서호화시(西湖花市)라는데 나는 동호화시(東湖花市)로 갔다.
이유는 단순히도...
택시기사가 막힌다고 가기 싫어해서 -_-
동호화시는 중산4로 근처의 전자상가 거리를 중간을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름 치렁치렁한 장식들로 꾸며놓아서 흥청거리는 명절 분위기가 꽤 난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경찰들도 여기저기 늘어서 있고.

목면화인가 도화인가 매화인가....
색깔로 봐선 목면화 같은데 도화같기도 하고.

인산인해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경찰 아저씨

귤산귤해(?)
광동 사람들의 새해맞이 풍습 중 가장 장 알려진 것은 역시 귤나무일 것이다. 귤(橘/桔)과 길(吉)의 발음이 비슷해서 새해엔 길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귤을 들여놓는 것. 귤의 모양이 주렁주렁 열린 엽전을 닮기도 했다. 꽃시장의 거의 1/4를 귤나무가 차지하고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둘씩 귤나무를 들고 있을만큼 귤의 인기는 대단했다.
딴 얘기지만 끽연의 끽喫이나 갹출의 갹醵 만큼이나 한자일거라곤 상상하기 어려운 발음의 귤橘

귤로는 부족했는지 이런 것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건 뭐지, 망고인가...
귀엽다고 생각해서 가까이 갔더니 좀 징그럽다;

귤인지 망고인지 모를 무언가 무더기 속에 앉아 있던 청년
왠지 이렇게 해 놓으니까 성스러운 스님의 이미지인데 뭐에서 연상된 것인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어쨌든 노래서 그런지 왠지 불교불교 느낌.

근데 그 위에 파는 건 갑자기 뜬금없는 벌레잡이통풀
알고보니 동남아 및 중국남부에 많이 자생한다고.
생긴 게 뭔가를 연상시킬만큼 괴상망칙하게 생긴데다가 펩신과 트립신을 분비한단다;;

대나무 장식품들
올해는 순풍을 받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배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장식만 해놓고 보다가 말라죽으면 버리는 건지 아니면 저렇게 해놓아도 물만 주면 무럭무럭 크는지는 모르겠다.

수선화 수선화 수선화
수선화를 보고서도 나는 무슨 꽃인지 이름도 몰랐지만 이 파뿌리 같은 꽃에 왠지모를 기시감이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난징박물관에서 수선화가 그려진 병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도 파뿌리같다고 생각하고 좋아했었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파뿌리는 처음이다.
중국 사람들이 수선화를 좋아한다는 건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졌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청초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불현듯 왠지 수선화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비웃지 마시오.

왠지 화투패가 떠오르는 것이 매화같다. 새빨간 꽃도 예쁘지만 이파리가 거의 없이 앙상한 가지 위에 붙은 것이 더욱 고혹적이다. 수선화와 비교하면 품위보다는 아찔한 매력을 가진 느낌.

복숭아꽃(도화)도 있다.
하지만 도화는 이렇게 활짝 핀 것보다는 몽우리만 빨갛게 진 것이 더 많아보였다. 매화와 마찬가지로 앙상한 가지 위에 진분홍색 꽃만 몽우리져 올라온 것이 아주 화려해 보였다. 도화는 사실 한국에선 도화살이라 해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여기선 도화운도 좋은 운으로 보는 보양이다.

홍콩의 시화(市花)이자 요리 나올때 장식으로 자주 쓰이는 자형화(紫荊花)도 가득.
그럼 이렇게 많은 꽃들 중에서 광저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많이 사가는 꽃은 무엇일까?
첫째는 도화, 즉 복숭아꽃이란다. 광저우 사람들은 춘절에 복숭아꽃으로 꽃꽃이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소위 말하는 "복숭아꽃 한그루면 온 집안에 봄이 가득하다一树桃花满庭春"는 것으로, 좋은 일만 계속된다는 얘기다. 복숭아꽃은 광저우 춘절의 크리스마스 트리라고도 할 수 있단다.
둘째는 당연히 귤이다. "大吉大利"를 상징하는 귤은 현재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데, 작고 앙증맞으면서도 단단한 과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또 금빛 찬란한 것이 보기만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란다.
셋째는 수선화인데 사실 대부분이 푸지엔 장주(漳州)에서 가져온 수선화 뿌리로, 이를 잘 길러서 새해 즈음에 꽃을 피운다. “花开富贵”라는 길조에 수선화의 수려하고 늘씬한 아름다움에 그 향기까지 더해져서 집집마다 꼭 하나씩 사가는 것이다.
광저우 꽃시장은 "花渡頭"라는 시장에서 시작되는데, 이 역사는 명나라 혹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저우의 꽃시장은 뤄푸산(羅浮山)의 약시, 동관(東莞)의 향시(香市), 염주(廉州)의 주시(珠市)와 함께 광동의 4대 시장으로 불렸다. 이러한 꽃시장이 일정 규모를 이루게 된 것은 1860년대에 이르러서로, 선풍제, 동치제 이후 藩署前과 十八甫 두 곳에서 새해맞이 꽃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꽃시장이 일정하게 열리게 된 것은 1920년 이후인데, 이때부터 음력 12월 28일부터 1월 1일이라는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장소에서 열리게 된다. 일제 침략기에도 꽃시장은 계속해서 열려서, 일설에 의하면 일본군의 비행기가 날아와 때때로 여기저기 포탄을 떨어뜨리고 가는 상황에서도 광저우의 시민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일을 하겠다는 양 태연하게 꽃을 골랐다고 한다. (이는 정말이지 성도 시민들이 원촨대지진 당시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자약하게 마작을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문혁으로 인해 꽃시장이 잠시 중지되었을 때에도 꽃시장은 자리를 옮겨 조용하게 계속되었으며, 현재는 정부의 지지 하에 매년 광주시 열군데에서 꽃시장이 순조롭게 열리고 있다.
한편 남는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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